2023. 4. 20. 17:09ㆍ패션 마르띠나
우아한 여성미의 극치 '뉴룩'
프랑스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크리스찬 디올은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따라 정치학을 전공했으나 건축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기에 예술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지원으로 아트 갤러리를 열어 예술적 감수성을 더욱 키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즈음 어머니와 형을 잃게 되고 세계적이 경기공황으로 아버지의 사업파산으로 집안이 몰락하게 되고 생계를 위해 일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그는 패션 일러스트를 그려 팔았는데 그것이 그의 디자이너로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여러 디자이너 하우스에서 디자이너 경력을 쌓으면서 41세에 이르기까지 파리에서 활동하며 자신을 이름을 패션계에 알려 나갑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 파리의 가장 큰 직물 회사의 사장인 마르셀 부싹이 크리스찬 디올의 재능을 알아보고 디올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크리스찬 디올의 브랜드가 탄생하게 됩니다.
1947년 2월 12일 디올은 자신의 첫 부티끄를 열었고 많은 기자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공적인 패션쇼를 열게 됩니다. 전쟁직후였던 그 당시의 여성들의 옷은 실용성 위주의 어두운 옷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찬 디올이 패션쇼에서 선보인 의상들은 상체의 곡선을 부드럽게 드러내고 가는 허리를 강조하는 풍성한 실루엣의 스커트로 우아한 여성미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의상들은 그동안 전생 속에서 잊고 지내던 고전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며 그 시대의 여성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이날의 성공적인 컬렉션은 '뉴룩'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며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크리스찬 디올을 당대의 최고 디자이너 자리에 올려주며 프랑스 파리를 패션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뉴룩 이후에도 여성스러움을 살리는 특유의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다른 새로운 디자인들을 선보이며 많은 상류층과 왕족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해외에도 패션쇼를 열며 미국의 뉴욕에도 부띠끄를 여는 등 매장을 확장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디올은 프랑스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1957년에 뉴욕 타임지 커버에 오르는 열광을 누렸지만 같은 해 심장마비로 안타깝게 사망하면서 화려했지만 짧았던 전성기를 뒤로 한채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디올 하우스의 롤러코스터 역사
크리스찬 디올을 잃은 디올 하우스의 위기를 이겨낼 다음 디자이너는 당시 21세의 어린 디자이너 입 생 로랑으로 낙점되었습니다. 이미 디올 생전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입 생 로랑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습니다.
입 생 로랑의 첫 번째 디올 컬렉션은 기대와 우려 속에 성대하게 펼쳐졌습니다. 뉴룩을 보다 입기 편안하고 가볍게 변모시킨 그의 스타일은 파리 패션계의 호평을 얻으며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드러내자 평가가 엇갈리기 시작했습니다. 디올의 색을 점점 잃어가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하우스와 갈등을 겪으며 그즈음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디올 하우스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입 생 로랑의 후임으로 마크 보앙이 정해지고 그는 다시 우아한 여성스러운 분위기로 기존 디올의 스타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고객들이 다시 디올 하우스를 찾으며 안정을 되찾게 되자 디올의 경영진은 사업확장을 통해 기성복 라인은 물론 아동복, 남성복, 향수, 코스메틱 사업과 해외 라이센스 계약까지 늘리면서 브랜드 가치 하락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지나친 사업 확장으로 위기를 맞은 디올 하우스는 베르나르 아르노가 인수하게 되고 아르노는 다시 고급화 전략으로 디올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디올 브랜드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이탈이라 디자이너 지안프랑코 페레를 영입했고 페레는 우아한 디올의 스타일에 모던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추가하여 디올의 컬렉션을 성곡적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그가 1995년 당시 다이애나 왕세자비에서 선물했던 레이디 디올백은 다이애가 비가 애용하며 사랑했던 백이 되면서 지금까지 크리스찬 디올을 대표하는 백이 되었습니다.
아르노는 페레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모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당시 신예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를 디자이너로 영입한 것이었습니다. 갈리아노는 그동안 디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거침없고 파격적인 콘셉트를 시도하며 새로운 디올을 선보였고 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우아한 디올을 좋아했던 기존 고객은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리아노의 거침없는 디자인은 시대와 맞물여 호응을 얻기 시작했으며 말안장 모양의 새들백이 빅히트를 기록하며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며 디올을 매출을 올려주었습니다.
여기에 슬림한 실루엣으로 남성복의 혁명을 가져다준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도 대중의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존 갈리아노와 함께 디올의 이름을 트렌디하게 바꿔 놓는 성과를 냅니다.
그러나 2011년 갈리아노는 유대인 비하 발언으로 비난을 받으며 디올 하우스에서 즉각 해고되었고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던 갈리아노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갈리아노 후임이었던 라프 시몬스는 그다지 임팩트는 없었지만 다시금 디올을 정갈하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갈리아노의 흔적을 지우는 데는 성공했으며 라프 시몬스 이후에는 발렌티노에 옮겨온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디자인을 맡고 있습니다.
디올의 비하인드 스토리
전 세계 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고전적인 우아한 실루엣의 상징이 된 뉴룩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풍성한 스커트를 연출하기 위해 지나치게 원단을 낭비한다는 의견과 코코 샤넬이 여성에게 해방시켰던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다시금 부활시켜 여성들의 인식을 퇴보시켰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면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걸 알았던 디올은 여성들의 욕망을 아름답게 채워줄 옷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그의 작품들은 영원한 클래식으로 남아 여성들의 마음을 아직도 설레게 하고 있으며 많은 디자이너들에 의해 재해석되며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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