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제왕 :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2022. 12. 24. 00:48패션 마르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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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렌시아가의 부활 

최근 몇 년간 신발 트렌드를 이끈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명품신발이 있습니다. 많은 셀럽들과 연예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발 트렌드를 주도했던 명품 브랜드가 바로 '발렌시아가'입니다. 양말 같기도 하고 투박한 형태로 못생겨 보였던 이 신발들이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예뻐 보이며 전 세계적인 유행을 선도하게 됩니다. 이 발렌시아가의 신발들은 전 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들의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제품을 사게 만들었던 핫한 디자인으로 다시 한번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발렌시아가가 떠난 후 거의 30년 가까이 쇠락해 가던 브랜드가 해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디자이너로 인해 가장 극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명성만 간신히 유지하던 발렌시아가 어떤 브랜드보다 더 극적으로 부활했고 모터사이클백, 스피드 러너, 트리플 S 등 최근 몇 년간 가장 핫한 명품 브랜드가 됩니다.

 

 2. 창업자 발렌시아가

 발렌시아가는 1895년 스페인의 헤따리아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밀수를 감시하는 배의 선원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습니다. 발렌시아가는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다섯 형제 중에 막내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어촌마을 근처는 스페인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여름휴가를 보내는 별장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 그들과 함께 온 잘 나가는 상인들, 예술가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었으며 그들이 파티를 위해 필요했던 옷들을 수선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버지가 관리하던 배는 이들의 이동을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당대의 왕족, 귀족, 엘리트들, 예술가들과 자연스러운 친분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발렌시아가의 엄마는 이들의 옷을 리폼하고 수선하며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발렌시아가는 상류층 사람들의 패션을 접하게 되면서 유행에 눈뜨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발렌시아가 아버지는 그가 11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를 위해 그는 엄마 일을 돕게 됩니다. 힘들게 어머니 일을 돕던 와중에 발렌시아가는 중요한 귀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카사 토레스 후작 부부'입니다. 발렌시아가 어머니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카사 토레스 후작 부인은 그 당시 유행하는 옷을 입었고 엄마 일을 돕던 발렌시아가는 후작부인의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에 홀딱 반하게 됩니다. 또한 예술전반에 관심이 많았던 후작 부부는 별장을 유명한 그림과 화보들, 건축물과 사진들로 꾸며  놓았는데 이것은 어린 발렌시아가는 영향을 주며 후에 자신의 디자인에 적용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일을 열심히 도우며 보내던 어느 날, 발렌시아가는 당돌하게 후작 부인에게 파리에서 사온 옷을 그대로 카피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걸 들은 후작부인은 호기심에 어린 발렌시아가에게 원단과 장비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발렌시아가가 가져간 옷과 똑같은 옷을 만들어 왔으며 새로 만들어 온 옷이 오히려 재봉이 더 훌륭했습니다. 발렌사이가의 재능에 놀란 후작부인은 산 세바스티안에 있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부띠끄에 발렌시아가를 추천했고 그곳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발렌시아가의 패션계의 경력이 시작됩니다. 

 

3. 패션 모드계의 교황

 유명한 부띠끄에서 다양한 테일러링 기술을 익히며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되었고 언젠가 프랑스로 진출할 것을 대비하며 불어도 틈틈이 공부하게 됩니다. 1917년에는 산세바스티안에 자신의 부띠끄를 오픈했고 전쟁 때문에 휴양지로 온 귀족들의 눈에 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스페인 곳곳에 가게를 확장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으로 어머니 이름을 딴 가게도 오픈하게 됩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첫 샵을 열게 됩니다. 중년의 나이에 새롭게 시작한 발렌시아가는 세계에서 가장 큰 패션의 무대에서 더 큰 최고의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남들이 밋밋한 라인의 옷을 만들 때 발렌시아가는 유행에 따라가지 않고 인체의 곡선이 두드러지는 화려한 옷들을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디올의 뉴룩과 같은 화려한 라인들이 유행할 때는 헐렁해 보이는 코쿤라인을 선보이며 유행과는 다르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며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가 가진 테크닉으로 구조미와 입체감을 살리며 새로운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극찬을 이끌어 냅니다. 디자인부터 재단, 바느질, 수선까지 모든 걸 완벽하게 구현하고 혼자 다 할 수 있었기에 '패션 모드계의 교황'으로 불리며 당대의 디자이너 디올이 그를 존경했고 샤넬이 인정한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렇게 경력의 시작부터 끝까지 승승장구하던 발렌시아가는  패션의 흐름이 고급 맞춤복에서 고급 기성복으로 바뀌어 가면서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힐 사람이 없다" 이런 말을 하면서 1964년 패션계에서 돌연 은퇴를 하고 4년 뒤 눈을 감게 됩니다. 발렌시아가 사후 브랜드는 계속 추락하게 되고 그렇게 30년 가까이 시간은 흐르게 됩니다. 

 

4. 새로운 시작

 그러던 1997년 발렌시아가는 26살의 이름 없는 젊은 디자이너인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를  고용하게 됩니다. 그는 전통적인 이름을 가졌으나 30년 동안의 잊혀졌던 브랜드를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그의 첫 컬렉션에서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게 됩니다. 그는 평단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았는데 그가 디자인한 모터사이클 백은 2000년대 초반을 완전히 휩쓸었고 게스키에르는 거의 망해가던 브랜드를 완전히 되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발렌시아가에서 15년을 성공적으로 보내고 완전히 브랜드를 살린 게스키에르는 LVMH의 루이뷔통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게스키에르의 성공은 브랜드 내부에 있어서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실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인  피비 파일로나 알렉산드로 미켈레 같은 젊은 신성들을 등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후 발렌시아가는 알렉산더 왕을 거쳐 뎀나 바질리아가 디자인 책임자로 부임하게 됩니다. 뎀나 바질리아는 스피드 러너, 트리플 S, 그리고 칼라가 넓고 소매가 긴 셔츠 등등 전 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게스키에르의 부활의 시대와 뎀나 바질리아의 시대의 대히트를 거치면서 발렌시아가는 매출 1조 원 넘게 올리는 세계에서 가장 핫한 명품 브랜드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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