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스타일 아이콘 : 코코 샤넬

2022. 12. 25. 22:25패션 마르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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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넬의 시작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바로 '가브리엘 샤넬'. 19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12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잡상인 아버지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후에 어른이 된 샤넬이 "나는 12살 때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때 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린 시절은 그녀에게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보육원에 버려진 이후 그녀는 생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바느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힘든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군인들이 주 고객이었던 뮤직홀의 가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큰 인기를 끌며 '코코'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샤넬은 힘들었던 시절의 그 별명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기마대에서 근무하는 부유한 집안의  '발장'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발장의 경마를 위한 저택에 샤넬은 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샤넬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샤넬이 유행시킨 디자인을 보면 동시대의 다른 디자인에 비해 그렇게 화려하지 않고 활동성 있는 디자인이 많았는데 그 시대에 유행하던 몸매가 드러나는 화려한 옷은 깡마른 몸을 가진 샤넬에게 어울리지 않았고 그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모자 대신에 작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직접 만들어 썼다고 합니다. 집주인 한마디면 쫓겨나는 정부로 늙고 싶지 않았던 샤넬은 점차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샤넬은 발장에게 모자를 만들어 팔고 싶다는 얘기를 하게 되고  1909년에 파리에 있는 발장의 집으로 가서 작고 심플한 모자를 만들어서 팔게 됩니다. 모자는 잘 팔렸고 샤넬은 모자 사업을 더 확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 운명의 상대 '아서 카펠'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되는데 그는 바로 샤넬이 평생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로 보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서 카펠'이었습니다. 발장의 친구였던 그는 석탄으로 큰 돈을 번 젊은 재벌이었는데 모자 사업을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았던 발장과 달리 카펠은 샤넬의 은행 대출을 받게 해 주었고 그 덕분에 샤넬은 모자을 파는 첫 매장을 파리 깡봉가 31번지에 오픈하게 됩니다. 카펠은 보이지 않은 뒤에서 샤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게 됩니다. 샤넬에게 예술가를 소개해주고 도빌이라는 휴양지에도 가게를 오픈해 줍니다. 안목 있는 사업가였던 카펠은 휴양지에서는 사람들이 더 멋을 부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샤넬은 옷을 만들어 팔게 됩니다. 코르셋이 없어도 되는 헐렁한 스타일의 편안한 옷차림을 만들었는데 그 옷은 휴가 때 편안하면서도 예쁜 옷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되고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유럽의 귀족들이 휴양지로 피난을 오게 됩니다.  휴양지 두 곳에 있던 샤넬의 매장은 피난온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고 샤넬의 명성이 전 유럽으로 퍼지는 계기가 됩니다. 전쟁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여자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는데 편하고 예뻤던 샤넬 스타일이 또 인기를 끌게 됩니다. 

 샤넬은 연인이었던 아서 카펠이 귀족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야심가였던 그를 이해했으며 그때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를 자르게 되고 짧은 머리를 유행시킵니다. 실제로 카펠은 귀족과 결혼하게 되고 그래도 샤넬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됩니다. 그러나 1919년 카펠은 교통사고를 세상을 떠나게 되고 샤넬은 충격과 깊은 슬픔에 빠지에 됩니다. 후에 샤넬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카펠을 잃으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3. 샤넬 넘버 5

샤넬은 그 이후에도 아주 유명한 귀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러시아 황제의 조카였지만 혁명으로 쫓겨난 드미트리 대공, 유럽 최대의 부호 웨스트 민스터 공작등을 만나며 영감을 얻게 됩니다. 드미트리와 휴가를 갔다가 향수를 만드는 에르네스트 본을 만나게 되는데 향수를 만들고 싶었던 그녀는 에르네스트 보에게 10가지 시제품을 받게 되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다섯 번째 향수를 고르고 이름을 '샤넬 넘버 5'라고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1921년 5월 5일에 출시된 이 향수는 처음으로 더블 C마크가 붙게 되고 향수 역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샤넬이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요트와 승마, 사냥을 즐기며 다닐 때 영국 남자들이 입던 소재를 눈여겨보게 되는데 그 소재가 바로 샤넬이 재킷의 소재로 쓰던 트위드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샤넬이 1살 연하의 나치 독일 외교관과 만났는데 2차 대전이 끝난 후 부역했다는 이유로 연행이 됩니다. 그때도 처칠 수당과 친했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샤넬이라도 2차 세계대전을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 전쟁기간에 향수와 액세서리 매장 말고는 거의 모든 매장이 문을 닫게 됩니다. 또한 나치 독일 외교관과의 연애가 문제가 되어 프랑스 밖으로 쫓겨나다시피 합니다. 프랑스에서 외면받던 샤넬은 스위스로 건너가 서서히 잊혀 갑니다. 

4. 샤넬의 부활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후 샤넬은 복귀를 준비하게 됩니다. 샤넬이 향수 브랜드쯤으로 잊혀 가던 1954년 2월 샤넬이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게 됩니다. 기대와 달리 패션쇼는 대실패를 하고 여전히 프랑스와 유럽은 샤넬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샤넬의 과거를 문제 삼았던 유럽과 달리 미국은 샤넬의 과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복귀 패션쇼에 등장했던 옷들은 고급 상점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미국 언론들과 대중들은 열광했고 미국이 살린 샤넬은 다시 프랑스와 유럽을 움직였습니다. 

 1971년 쉬지도 않고 바쁠 땐 먹지도 않고 혼자 있는걸 못 견뎌하며 새벽까지 일하던 샤넬이 8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수많은 업적을 이루고 화려한 삶을 산 샤넬의 죽음 이후 회사는 하락세를 겪게 됩니다. 이때 샤넬 그룹의  실제 주인이었던 베르타이머의 손자가 등장합니다. 25살의 알랭 베르타이머가 경영권을 잡고 새 경영진을 영입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칼 라거펠트가 등장합니다. 독일 출신의 파리 디자이너 콘테스트에서 입생로랑과 함께 우승해서 패션계에 데뷔한 전설의 패션왕이었습니다. 부활을 꿈꾸는 샤넬 경영진이 칼 라거펠트를 아주 오랫동안 눈여겨보았으며 뛰어난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샤넬을 카피하거나 샤넬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샤넬의 진정한 혁신과 부활을 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떄문입니다 . 1983년 샤넬의 영입된 그는 샤넬이 만든 코코 샤넬 스타일을 부활시키고 샤넬의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얻어  그걸 기반으로 샤넬 스타일을 되살려냅니다. 라거펠트 부임 이후 샤넬은 완벽하게 부활하였고 라거펠트 재임 36년 동안 샤넬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며 지금까지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강인하고 능력 있고 로맨틱한 삶을 살았던 코코 샤넬, 그리고 샤넬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라거펠트까지 떠나보낸 지금, 샤넬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대가 됩니다. 

 "샤넬의 스타일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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