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수많은 최초를 남긴 디자이너 : 입 생 로랑

2022. 12. 24. 13:59패션 마르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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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션 천재의 탄생 

 패션계에서 천재라 불리었던 입생로랑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오랑이란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자란 그는 후에 특유의 색감, 에스닉룩에도 디자인의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입생롤랑은 보험업, 극장업을 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는데 어렸을 때부터 무대 의상과 공연의상을 많이 보며 직접 종이 인형에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혀보고 엄마의 옷을 잘라 디자인하기도 하며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게 됩니다. 

 입생롤랑이 17살 때 디자인 콘테스트 드레스 부분에 출품해서 3등을 하게 됩니다. 입생롤랑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던 그의 아버지는 그를 파리의 유력자에게 소개하는데 그는 바로 파리 보그의 편집장 '미셀 드 브뤼노프'였습니다. 입생롤랑을 만난 브뤼노프은 그에게 재능을 살린 디자인 공부를 독려했고 이듬해 파리로 건너가 다시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여하게 되고 이번에는 1등을 하게 됩니다. 입생롤랑이 보여준 디자인 스케치를 본 브뤼노프는 그 당시 디올이 자신에게만 보여 주었던 디자인과 너무 비슷한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입생롤랑의 뛰어난 재능에 놀라며 입생롤랑을 디올에게 소개하기로 결심합니다.

2. 디올과의 운명적 만남 

디올 역시 입생롤랑의 재능의 높게 평가하며 19살의 입생 롤랑을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고용하게 됩니다. 입생롤랑과 디올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했고 도와주며 발전시키는 환상의 호흡을 보여줍니다.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디올이라는 브랜드로 함께 잘 나가게 되었으나 불과 2년 만에 크리스찬 디올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입생롤랑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프랑스 오뜨 꾸뛰르 전체 매출의 절반 가까이 담당하고 일하는 종업원만 1400명에 달하는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는 계속 이어져야 했기에 디올하우스는 크리스찬 디올의 후계자로 24살의 입생롤랑을 낙점하게 됩니다. 21살의 어린 청년이 브랜드의 전체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쇼에서 부드러운 실루엣의 트라페즈 라인을 선보이면서 극찬을 받고 대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2년을 보내던 입생롤랑은 새로운 도전을 시도합니다. 부유층이 주도했던 주류 문화가 아닌 주류문화에 저항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젊은이들의 영향을 받은 디자인을 내놓게 되었는데 그러한 새로운 시도는 기존의 고객들에게 외면을 받게 됩니다. 고객의 외면을 받은 입생롤랑은 군입대를 하게 되고 참전을 하였으나 곧바로 신경쇠약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결국 디올에서는 쫓겨나게 되고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3. 패션의 최초를 시도하다 

입생롤랑의 이름의 건 첫 컬렉션은 엄청난 찬사가 쏟아집니다. '샤넬 이후 최고로 아름다운 컬렉션이다' '디올의 황태자가 드디어 왕좌에 올랐다' 이런 평가를 들으며 계속 성공 가도를 달립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잘 올라타야 하는데 그 당시 파리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의 확산, 여성들의 사회진출 증가하면서 귀족 부자 말고도 평번한 여성들도 자신을 꾸미도 싶은 욕구가 생겨나게 되고 입생롤랑은 바로 그 흐름에 올라타게 됩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기성복 라인 생롤랑 리브고쉬를 만들고 비싼 고가의 맞춤복이 아닌 사이즈만 맞으면 입을 수 있는 기성복 브랜드를 만든 것입니다. 기성보 라인 생롤랑 리브고쉬는 급증하는 수요로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들의 위한 턱시도입니다. 남성들이 담배 필 때 입는  '르 스모킹'이라고 불리던 턱시도를 여성의 몸에 맞게 스타일을 재창조시키게 됩니다. 전에 없던 여성용 턱시도는 그의 오뜨 꾸뛰르에서는 단 한벌만 팔렸으나 생롤랑 리브 고슈 기성복 라인에서는 엄청나게 팔리며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샤넬이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입생롤랑은 여성들에게 권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기성복 라인의 여성용 턱시도와 투피스 여성용 바지 정장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혁신적인 시도는 극찬을 받으며 살아있는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입생롤랑 디자인 25년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그러나 입생롤랑의 기성복, 화장품, 향수라인으로 거대 그룹이 되어가면서 라이센스를 너무 남발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면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또한 일본매출에 의지하던 브랜드가 일본의 경제 불황으로 일본 매출이 줄면서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경영권이 외부로 넘어가게 되었고 입생롤랑은 브랜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스스로 물러나 은퇴를 선언했고 2008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입생롤랑을 인수한 키링그룹은 180개로 남발되었던 라인센스를 11개로 줄이고 브랜드 가치를 회복하는데 전력하면서 톰 포드, 에디 슬리먼, 안토니 바카렐로 등에게 디자인 책임을 맡겼으며 에디 슬리면 시대에는 이름까지 바꾸는 변화를 주면서 완전히 브랜드 가치가 살아나게 됩니다. 

 "유명인이든 평범하든, 내 옷을 입어준 모든 여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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